"책은 힙하다"…출판업계 순풍, 언제까지 이어질까
건재한 한강 특수…문학동네·창비 실적 오름세
국내 정세 영향, 정치·헌법 관련 인물 도서 주목
출판계 3대 역주행 아이콘, '모순·급류·스토너'
책 문화의 확장, 북클럽·서울야외도서관 인기
주요 출판사·서점, 매출액·영입이익 일제히 ↑

[서울경제TV=유여온 인턴기자]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책은 무엇일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 12일 '4월 화제의 책 200선'을 공개했다. 1위는 김영하 작가의 신작 에세이 <단 한 번의 삶>. 그 뒤를 이은 건 한강 작가의 신작 <빛과 실>로,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포함해 미발표 시와 산문 등이 담겼다. 수상으로부터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한강의 인기는 여전한 모습이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등 총 4권이 2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실적을 보더라도, 한강 작가와 직접 연결된 출판사·서점의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디에센셜 한강>, <흰>, <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출간한 문학동네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전년 대비 43.8%, 297% 상승한 463억 원, 127억 원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상 소식에 발맞춰 선보인 '한강 기획전'이 구매 전환율을 크게 끌어올려 이 같은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 업계의 주된 분석이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낸 창비도 실적이 급등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67.7%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무려 388% 뛰어 각각 426억 원, 83억 원을 기록다.
출판업계 한강 특수가 계속되는 가운데 눈에 띄는 변화는 국내 정세와 밀접한 서적들의 약진이다.

12위를 차지한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 결정문>이 대표적이다. 이는 탄핵 결정문과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하나로 묶은 책인데, 계엄과 탄핵 국면을 지나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헌법 관련 도서’ 인기를 이어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예스24에 따르면 작년 12월과 올해 1월 '헌법 관련 도서'의 매출은 전월 대비 각각 219%, 7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월을 기준으로 보면 전년 대비 약 13배(1285.4%) 나 뛴 수치다. 교보문고 또한 ‘헌법 필사책' 판매량이 계엄 직후(12월 4일~12월10일) 전주 대비(11월 27일~12월3일) 183% 증가했다는 통계를 내놓은 바 있다.
3위, 7위, 13위도 이 같은 정치적 영향권 아래서 인기를 모은 것으로 분석된다. 3위에 오른 <결국 국민이 합니다>는 이재명의 정치철학을 담은 신작이고, 13위 <줬으면 그만이지>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의 스승이자, 얼마 전 이재명 대선 후보가 차담을 나눈 것으로 언론에 알려진 '김장하 선생'을 다룬 책이다. 김장하 선생은 지난 2023년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통해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번엔 그가 후원한 장학생 중 한 명이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한편, 7위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가 2009년 내놓은 책을 특별증보판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트렌드는 신작이 아닌 '과거에 출간된 소설들'의 역주행이다. 5위 <모순>(1998년 양귀자 作), 15위 <스토너>(2015년 존 윌리엄스 作), 16위 <급류>(2022년 정대건 作)는 6개월 이상 꾸준히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 중이다. 한때 반짝인기를 누리고 사라지는 작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모순>은 약 5년 전부터 별도의 마케팅 없이 판매 상승세를 타며 출판계 미스터리로 불리고 있다. 199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2020년 갑자기 판매량이 급증한(158%) 이후, 2023년 85%, 2024년 131% 성장하며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170쇄까지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SNS 바이럴이 흥행을 주도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모순>을 대표하는 문장들이 인스타, X 등지에서 활발히 공유되며 책에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대거 유입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등 <모순> 속 많은 구절이 '명대사'로 전파되며 꾸준히 대중의 공감을 얻는 중이다.
한편, <급류>와 <스토너> 붐은 유명인의 영향이 컸다. <스토너>는 홍진경의 유튜브로, <급류>는 인기 북스타그래머를 통해 재조명받으며 신규 독자층을 끌어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인의 추천으로 판매량이 급증하는 현상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11위를 차지한 <초역 부처의 말>의 경우를 보더라도, 올해 1월 장원영이 해당 책을 즐겨 읽는다고 언급한 당일에만 전일 대비 20배(1983.3%)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인기 연예인을 통해 독자 군이 확대되는 현상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책이 힙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흐름을 긍정적인 신호로 본다. 한 번의 구매 경험이 다음번 구매의 진입장벽을 낮춰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독서 열풍은 북클럽으로도 이어지는 추세다. 북클럽은 민음사가 2011년 가장 먼저 선보인 독자 참여 프로그램이다. 이후 문학동네 등 대형 출판사를 중심으로 운영돼 오다 최근에는 중소형 출판사도 동참하는 모양새다. 5만 원가량에 5∼6권의 책과 각종 굿즈를 받을 수 있고, 북토크 등 여러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어 신청자가 매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음사가 진행하는 '민음북클럽'의 경우, 지난해 가입 인원 2만 명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2021년 대비 5배 증가한 수치다. 문학동네 북클럽 또한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한 2018년 이후 5배 가까이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음북클럽은 자사의 물류창고를 개방하는 패밀리 데이 행사와 작가 북토크 등을 진행하는데, SNS상의 후기 게시물들이 매번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문학동네는 온·오프라인 행사를 넘어 회원들에게 책 제작에 참여할 기회도 제공한다. 신작 출간 전, 책 표지 시안에 대한 의견을 받는 것이다. 가입자가 수동적으로 책을 받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해 경험을 다각화하려는 시도로 엿보인다.
책을 통해 이용자와의 접촉면을 늘리려는 노력은 지자체도 열심이다. 서울시는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청계천에서 4년째 '서울야외도서관'을 운영해 오고 있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공공북클럽 '힙독클럽'을 내놓으며 출판기업들의 새로운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첫 모집을 시작한 서울시 북클럽은 사기업 대비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색다른 콘셉트의 연계 프로그램을 갖춰 2시간 만에 정원 1만 명을 모두 채운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 명소에서 독서를 즐기는 ‘노마드 리딩’, 필사·완독 인증을 통한 ‘독서 마일리지’ 쌓기 활동 등 다양한 콘텐츠가 시민들의 관심을 끄는데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 관계자는 서울 중심가에 마련된 개방형 공간이니만큼 접근성이 용이하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오든 홀로 찾든 진입에 부담이 없다는 점을 '서울야외도서관'의 큰 장점으로 꼽았다. 앞으로 서울야외도서관을 서울의 대표 문화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출판업계, 지자체가 일제히 '책 관련 경험 사업'에 주력하는 이유는 단연 마케팅 효과에 있다. 고객들의 자체 인증을 통해 보다 원활히 신규 인원을 끌어모을 수 있고, 이미지 개선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다.

이 순풍을 타고 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2024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출판사·서점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일제히 호조를 보였다. 주요 단행본 출판사(22개사)의 총매출액은 약 4653억원으로, 전년 대비 4.3% 증가했고, 총 영업이익은 105.3% 증가해 431억 원을 기록했다. 주요 서점 5개사(교보문고, 리브로, 알라딘커뮤니케이션, 영풍문고, 예스24)의 매출액 합계는 약 2조 2524억 원으로 전년 대비 4.1%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전년 114억 원 적자에서 189억 원으로 껑충 뛰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책에 대한 높아진 수요가 향후에도 무리 없이 지속될 것이란 일관된 전망을 내놨다. 타 업계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구·사무용품이 대표적이다. 책 꾸미기, 필사 등의 유행으로 관련 용품을 사 모으는 이들이 많아지며 문구업계도 덩달아 활황을 누리는 중이다. 밑줄을 그어도 자국이 남지 않는 색연필, 독특한 디자인의 책갈피, 커스터마이징 커버 등 다양한 제품군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실제 무신사 셀렉트숍 29CM에 따르면, 올해 1~3월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이 2023년 대비 3배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개최한 문구 박람회,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는 티켓 발매 3일 만에 매진을 기록하며 2만5000명 이상의 방문객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독서에 대한 관심이 여러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향후 또 어떤 트렌드가 부상해 책을 둘러싼 소비문화를 재편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yeo-on0310@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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