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일의 인생한편] 김형주 감독의 '승부'…두 수로 시작되는 바둑의 완성

전국 입력 2025-05-02 18:51:56 수정 2025-05-02 19:01:50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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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일 영화평론가

심우일 선문대학교 K-언어문화기업학과 강사/영화평론가


김형주 감독의 영화 <승부>는 바둑 황제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 사이에 벌어졌던 사제 대결을 소재로 한다. 불과 열다섯의 나이였던 이창호가 1990년 바둑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조훈현을 꺾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사건은 바둑 팬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膾炙)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을 영화로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건의 결말을 관객들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극적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승부>는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바로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과 고민을 부각함으로써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이창호를 바라보는 조훈현이라는 인물의 관점이 서서히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카메라 렌즈를 인물들의 내적 변화 양상에 맞추면, 영화 <승부>는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의 맥락을 지니게 된다. 

영화의 초반부는 제자 이창호를 가르치는 조훈현의 모습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스스로 신발 끈도 매지 못하던 제자 이창호가 자신만의 바둑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끝내 자신과 다른 바둑의 길을 걷는 제자를 인정하는 스승 조훈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바둑의 행마에 있어서 기세와 형을 중시하는 조훈현과 달리 마무리와 실리를 중시하는 이창호는 서로 갈등하지만, 결국 제자의 바둑을 인정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연출된다. 

특히 자신에게 기재가 없다고 생각한 이창호가 가출을 하자 뒤를 쫓아가 그를 붙잡고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풀어진 운동화는 이창호의 방황하는 마음을 상징하고, 그것을 단단히 묶어주는 스승의 행위는 제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스승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훈훈한 모습을 연출하던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러 제자에게 패배한 바둑 황제 조훈현의 모습을 다룬다. 영화 초반부 인터뷰 장면에서 조훈현은 세계 바둑 대회에서 승리한 후 “바둑의 신이 와도 지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 인터뷰 장면은 조훈현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바둑 황제로서의 자신감을 잘 보여준다. 그런 바둑 황제가 열다섯 나이의 소년에게 패배했으니,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다.

영화 <승부>에서 이창호는 실존 인물이지만, 영화적 장치로 바라보면 조훈현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동안 오만했던 조훈현은 이창호와의 대국을 통해 자신도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승부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음을 다시 새기는 것이다.

이제 바둑 황제가 아니라 도전자로 변모한 조훈현은 스승에게 물려받은 기국(棋局)에 적힌 “답이 없지만,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답이 없는 길을 고민할 때 드디어 바둑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몰락한 바둑 황제가 진정한 승부사로 변신하는 대목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승부의 의미는 조훈현이라는 바둑 황제가 국수라는 자신의 타이틀을 되찾는 데에 있지 않다. 조훈현의 승부가 펼쳐지는 전장(戰場)은 자신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세속이 부여한 바둑 황제라는 칭호를 내던질 수 있는 용기, 패배에 승복하고 제자를 극복해야 할 적수로 인정하는 마음가짐, 새로운 바둑의 길을 모색하는 구도자의 입장이 될 때 비로소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질문이 없이 어떻게 답을 구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결말부에 이르러 무심(無心)을 말하는 스승과 성의(誠意)를 말하는 제자의 모습을 조명하며 끝난다. 승부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스승의 의지와 그 마음을 성심성의로 대하겠다는 제자의 결기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수놓는다.


바둑을 완성하는 것은 한 명의 천재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반드시 두 사람의 수가 아름답게 어울려야 한다고 영화는 역설한다.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영화 <승부>가 전하고자 하는 인생의 메타포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그 길을 함께한 수많은 ‘적수’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은 더 깊고 아름다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우일 선문대학교 K-언어문화기업학과 강사 
·선문대학교 문학이후연구소 전임연구원
·롤링스톤 코리아 영화 부문 편집위원 활동 
·전주국제단편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임 
·TBN 전북교통방송 프로그램 ‘차차차’ 라디오 방송 활동
·웹진 <문화 다> 편집위원 역임 
·제3회 유럽단편영화제 섹션 ‘삶을 꿈꾸다 (DERAMERS)' 책임 강연 
·계간지 <한국희곡> 편집위원 역임 
 -연극인 인터뷰 <최치언, 정범철, 김광탁 작가> 및 연극 평론

‘인생한편’은 영화평론가 심우일이 매주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삶의 질문과 여운을 찾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취재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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